[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 그녀를 죽인 범인과 그녀의 목을 자른 자의 대결
그녀를 죽인 자 따로, 목을 자른 자 따로.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 시라이시 가오루 / 이소담 /
위즈덤하우스
당신은 이 주인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작가인지 출판사인지 독자에게 이런 도발을 한다. 그리고 첫 장면을 읽으면서
‘도대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평범한 회사원 시라이시 가오루. 남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옳다고 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거침없는
인물이다. 사교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성향의 주인공이다. 그래도 오랜
친구 ‘노다’가 있다.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큰 거래를 여럿 성사시킨다.
회사에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직원이다.
시라이시 가오루는 어느 날 시부야 하치코 동상 앞에 ‘그녀’의 머리를 가져다
놓는다. ‘도대체’는 여기서 나왔다. ‘그녀’는 누구이며, 그녀를 죽인 자는 또
누구인가. 시체에서 머리만 가져다 놓은 이유는 또 무엇인가. 더 놀랄 일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는 가오루다. 단지 가오루는 머리
주인을 알아볼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참 엽기적인
인물이다.
하치코 동상 앞에 서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편의점 봉지를
뒤적였다. 왼손에 든 가방으로 감추면서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서리가
끼어 파란 비닐 시트에 붙은 탓에 양손을 사용해야만 했다. 뒤를 지나는 구둣발
소리가 등을 찌르는 듯했다. 그러나 조심하자면 끝이 없다. 나는 그녀를
봉지에서 쑥 끄집어내 양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집고 살며시 들어 동상 다리
사이,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 10p.
평온하던 대도시는 엽기적인 사건에 발칵 뒤집힌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건은
빨리 진전되지 않는다. 그 많은 CCTV와 몇몇 증거들이 있음에도 경찰의 수사는
성과가 없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아니 내가 사건을 일으키고 나서 벌써 사흘째다. 그렇게
확실한 실마리가 있는데도 아직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나.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고생을 하며 그녀의 머리를
잘랐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서둘러 조사하기만 하면 된다. 시부야 역 앞에 사람
머리를 유기한 엽기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나를 체포하기 위해. -
52p.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 가오루는 평소처럼 회사를 다니는 데, 의문의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나는 네가 그녀의 머리를 가져다 놓은 일을 알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번에는 ‘그녀’의 손가락이 이케부쿠로 공원에서 발견된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집과 시체의 존재를 알았을까. 혹시 그가
그녀를 죽인 범인이 아닐까. 경찰은 용의자로 가오루를 지목한다. 가오루는
자신의 누명을 벗고 그녀를 죽인 진짜 살인범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누군가 그녀를 죽였고, 가오루는 단지 그녀의 머리만 잘랐을 뿐이다. 또 누군가
그녀의 손가락을 잘라 공원에 갖다 놓았다. 주인공과 범인 모두 정상이
아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녀를 죽인 범인, 가오루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범인의
윤곽이 잡힌다. 제일 가까이 있는 인물,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인물. 그러나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두 번의 반전 끝에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초반부의 서사를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모든
복선은 의미 없어 보이는 텍스트 속에 있기 마련이다.
친구 노다를 집에 데려가 냉장고 속 그녀를 보여주었을 때, 노다는 놀라지
않는다. 가오루보다 더 침착한 것 같다. 직장에서 아웅다웅하는 실장도 냉장고
속 그녀를 목격한다. 등장인물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그 와중에 가오루는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고, 지역적 정전으로 냉장고는 기능을 못하고 있다.
좌충우돌. 심각한 범죄 상황에서 주변 상황은 시트콤을 보는 듯하다. 가오루의
직장 상사는 대학동문이며 가오루가 머물 집을 소개시켜 주었다. 회장의
비서실장과 연애 중이다. 가오루가 경찰에 쫒기는 상황에서 상사는 범인의
실마리를 추리한다. 혼돈 속에서 가오루는 또 다른 가설을 세운다. 두 번째
반전으로 상황은 끝을 맺는다.
앞에서 가오루는 사교성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가오루는 세상사에 초연한 듯
관심이 없고 비관적인 생각이 바닥에 깔려있다. 미래를 희망하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며 소소하게 살자는 요즘 일본 청년 모습이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연결’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세상과, 사람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다. 죽은 그녀, 그녀를 죽인 그,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죽은 그녀를 나몰라라 할 수 없고, 죽인 그를 무작정 매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됐다. 그녀는 그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 한 명이라도 알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고독하지 않다. 내게는 노다와 실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내가 있다. 그렇다면 기쁘겠는데, 실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이란 혼자
살아가기 어렵다. 아니, 혼자 죽기도 어렵다. - 311p.
시라이시 가오루는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로 제29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상 우수상을 받으며 미스터리 작가로 데뷔한다. 사건이 엽기적이지만
내용과 전개방식은 참신하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필명으로 한다.
주인공이 독특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라는 것,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후속작 [모두가 나에게 탐정을 하라고 해]도 기대해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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