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아케이드다. 아케이드라고 해도 되나
망설여질 정도였다. 어쩌면 아케이드라기보다 아무도 모르게 우연히 생겨난
세계의 우묵한 구멍이라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 10p.
세상 끝 아케이드 – 작은 아케이드가 세상의 전부. 그러나 그 세상은 좁지 않다.
세상 끝 아케이드 / 오가와 요코 / 권영주 / 현대문학
最果てア-ケ-ド / Yoko Ogawa
아케이드(arcade)는 아치형의 지붕이 덮인 통로에 상점들이 죽 들어서 있는
거리를 말한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 유튜브 영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아니지만 다양한 가게가 모여 있어 쇼핑이 편하다.
아케이드의 특성은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 어떤 곳은 지역
명소가 되기도 한다.
오가와 요코의 [세상 끝 아케이드]는 현실의 화려한 아케이드를 보여 주지
않는다. 오래되어 낡고 사람들 왕래가 뜸한 한적한 아케이드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있다. 죽은 이의 기억이
담긴 물건을 사고, 슬픔을 풀어놓고, 위로받고 또 힘을 얻는다. 아케이드의
관리인이자 배달원인 ‘나’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아케이드에서 치유하며,
‘나’의 이야기와 상점 주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다양한 사연들이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격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세상에서
작가는 다른 것 다 지우고 조용함과 농밀한 삶을 이끌어낸다. 정적이고 고립된
아케이드 속에서 ‘나’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경계를 허물며
넘나든다.
아케이드 안에는 여러 상점이 있다. 그들은 물건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이는 물건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안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아케이드는 곧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이룬다.
'대체 이런 걸 누가 사는데?' 싶은 물건을 다루는 가게들만
모여 있으니 어쩔 수 없으리라는 자각은 상점 주인들에게도 있다. 점포 입구는
어디나 그 이상 줄이려야 줄일 수 없을 만큼 좁다. 천장은 낮고, 안도 그렇게
넓지 않고, 쇼윈도는 모형 정원 정도의 공간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그런 소박함에
걸맞은 물품들을 취급한다. 사용된 그림엽서, 의안, 휘장, 태엽, 장난감 악기,
인형 전용 모자, 문손잡이, 화석, 하나같이 우묵한 구멍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숨죽이고 있는 듯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손님은 온다. - 12p.
소설에는 10개의 아케이드 상점 이야기가 나온다.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론 집안의 비극을, 개인의 아픔을, 쓸쓸함을 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내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는 것이
때론 힘들고 아프지만 잘 살아낼 수 있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니까. 다 읽고 나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활짝 펴진다. 용기를 얻는다.
대학 노트가 한 권 한 권 글자로 메워지고, 연필은
몽땅하게 줄어들었다. 등이 쑤시고, 공책은 땀으로 축축하고, 눈도 가물거리지만,
신사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괜히 무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며 감촉을 확인한
뒤 있던 곳에 되돌려놓는다. 그 일을 한없이 반복한다. 과거에 딸이 탐색했던
길을 따라가며 희미한 자취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애가
그렇게 바랐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을 대신 밟는다. - '백과사전 소녀', 52p. ~
53p.
의상 담당 / 백과사전 소녀 / 토끼 부인 / 고리 집 / 종이 상점 시스터 /
손잡이 씨 / 훈장 상점 미망인 / 유발 레이스 / 유괴범의 시계 / 포크댄스
발표회
오가와 요코의 작품 중 처음 읽은 책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었다. 특이한
성향의 작가다. 작가의 작품은 매우 정적이고 고요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요함은 쓸쓸함으로 이어지고 쓸쓸함은 슬픔으로 이어진다. 착 가라앉는 작품
성향이지만 의외로 따뜻한 정서를 담고 있다.
유괴범의 시계 - 시간과 시간의 틈바구니에 귀 기울이고 싶다.
아케이드에서 나와 바로 정면으로 전찻길 건너편에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다.
흰 문자판에 검은 숫자와 바늘 두 개. 쓸데없는 장식은 일절 없이
무덤덤하리만큼 실용성만 추구하는 크고 둥근 시계다.
예전에 이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 아이는 유괴범에게 잡혀가 두 번
다시 못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소문을 믿어 유괴범의
시계라고 부르며 무서워했고, 시계를 올려다보거나 그 아래를 지나치는 것조차
피했다.
물론 나도 문자판이 시야에 얼핏 들어오기만 해도 허둥지둥 눈을 감았고,
전찻길 건너편에 볼일이 있을 때는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는 횡단보도로 길을
건넜다. 아케이드에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뭔지
모를 저주받은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아 더더욱 무서웠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늘은 천천히 기어가듯 움직일까, 아니면 재까닥 튀듯 앞으로
나아갈까. 시계 속에 손잡이 씨 가게에 있는 것 같은 작은 방이 있어, 그곳에
유괴범이 혼자 살고 있다. 기름통과 걸레를 들고 태엽을 닦는다. 그러면서
틈틈이 유괴하기에 안성맞춤인 어린애가 없는지 문자판의 작은 틈새로
물색한다. 바늘이 움직이는 순간, 공기의 작은 흔들림이 유괴범의 귀에 파동을
일으킨다. 나도 파동을 맛보고 싶다. 시간과 시간의 틈바구니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랬건만 화재가 있은 뒤 무심코 시계에 눈을 주었다가 싱겁게 목격하고
말았다. 어렸을 때 상상했던 만큼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신비스럽지도 않고,
담담히, 당연하게, 그저 정해진 각도만큼 움직이고 끝이었다. - 195p. ~ 197p.
‘유괴범의 시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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