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두 남자. 둘을 연결하는 것은 시대적 광기,
맹목적인 과학자와 돈이면 뭐든 하는 기업의 그릇된 철학이었다. 두 남자는
시대의 아픔을 물려받았다.
숙명 / 히가시노 게이고 - 시대적 광기가 낳은 두 남자의 숙명. 운명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숙명 / 히가시노 게이고 / 권남희 / 소미미디어
宿命 / Keigo Higashino
오래전 작품이 다시 번역, 출간되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10년, 20년 전의
번역과 지금의 번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게 번역하고 새로운
독자들이 찾아 읽으면 작품의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 나도 개정판을 읽으면서
몰랐던 작품을 알게 된 경우가 많다. [숙명]이 그 예다. 개정판이 나오고서야
이런 책이 있는 줄 알았다. [숙명]은 2007년에 구혜영 번역으로 도서출판
창해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 권남희의 번역으로
재출간되었다.
[숙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대표작 또는 인기작의 목록에서 보지 못했다. [숙명]은 작가가 1985년
[방과후]로 데뷔하고 5년 후(1990년)의 작품이니, 작가의 초기작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초기작품이 미스터리에 집중했다면, 이후 사건의 원인, 인물관계,
범행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작풍이 시작된다. 추리에서 이야기로 비중이
높아진다. [숙명]은 단순 미스터리를 넘어 다채로운 사건과 작풍으로 확장되는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에는 늦게 소개되었다. 요즘은 작가의 이름값
덕분에 동시 출간된다.
와쿠라 유사쿠와 우류 아키히코는 초등학교 입학 전 벽돌병원 뜰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을 시작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하는
라이벌 관계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 후 형사와 살인사건 관련자라는
입장으로 만난다. 아키히코의 아버지이자 대기업의 회장인 스가이 마사키요가
독화살에 맞고 살해되는데, 아키히코는 용의자 중 한 명이다.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그들만의 관계. [숙명]은 두
사람을 둘러싼 숙명의 의외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나온다. 살인사건이 중심에 있지만, 사건은 의외로 일찍 해결된다.
사건보다는 두 인물의 관계, 그리고 30여 년 전의 배경이 촘촘히 얽혀있어서
추리소설이라고 한정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마지막에 두 남자의 숙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는데, 충격이다. ‘숙명’이란 게 이런 거구나,
탄식하게 된다.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내 인생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38p.
‘뭔가가 있어.’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다. 그
이후로 그녀의 집안에 행운이 잇따랐다. 하지만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느꼈다. 뭔지 모를 거대한 힘이 늘 지켜보면서 조금이라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종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43p.
작가는 30여 년 전에 이미 현대의학과 뇌신경과학의 소재를 다루었다. 최근에
나온 작품 중에 뇌신경을 다룬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그 시작이라고 보면
되겠다. 거기에 전쟁 중 일본의 과학자, 의사들의 광기가 결합 되어 근원적인
배경을 만들게 되는데,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과학과 의학이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된다면 벌어질 일들이, 그리고 그 피해를 받는
일반인들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지능장애가 어쩌면 실험 후유증이거나, 다른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사나에도 원래는 평범한 여성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유사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돈만 있으면 사람도 실험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에 대한 분노였다. - 399p.
시대적 광기가 낳은 숙명, 현대의학과 인간의 뇌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비밀,
복잡한 인간관계를 치밀하게 이끌고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국내
독자들에게는 지명도가 낮은 작품이지만, 읽어보면 큰 비중을 두게 될
작품이다. 뇌과학과 관련해서는 작가의 작품 [위험한 비너스]와 결을 같이
한다.
숙명 - 어긋난 인연으로 만나게 되다니, 아무나 붙잡고 원망이라도 퍼붓고
싶군.
널 만나기 훨씬 전부터 걔랑 기이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거든. 말은 이렇게
해도 나에게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말하자면 숙적... 이라고나
할까?
중학교에서도 나는 그 녀석을 이길 수 없었어. 2등은 할 수 있지만 도저히
1등은 될 수 없었지. 모든 분야에서 그랬어. 전부 그 녀석 때문이었어.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감탄했지만 한 번도 나 자신한테 만족한 적이 없었어.
전학을 가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
고등학교 시험도 아키히코가 들어간 곳으로 쳤어.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결과는 똑같았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았고 굴욕감만 쌓여갔지. 그
녀석한테 보기 좋게 당한 거야. 그것도 철저하게. 무슨 짓을 해도 그 녀석을
이길 수 없었으니까 포기했지. 어차피 대학도 다른 데로 갈 거니까 승부는
거기까지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3학년이 되고 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어. 우류가 의사가 되려고 도와 의과대학 시험을 본다잖아. 나랑 같은
학교를 지망한 거야. 불길하더라고. 이게 결정적인 승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과는 보기 좋게 그대로 된 거야. 걔는 합격, 나는 불합격... 널
만났던 것도 마침 그때였고...
신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이렇게나 어긋난 인연으로 만나게 되다니, 아무나
붙잡고 원망이라도 퍼붓고 싶군. - 187p. ~ 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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