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1.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그래, 나는 연필이다 / 박지현 / 퓨처미디어
 
     연필을 손에 쥐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써 나가며, 미래로 진보하는 자유를 얻는다. 세월을 이겨낸 위대한 발명품과 작품들의 시작엔 연필이 함께 했다. 베토벤의 오선지와 반 고흐의 화폭, 그리고 에디슨의 손에도 연필은 쥐어져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 쓰여 있는 이 문장들은 연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의미를 압축한 문장이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익힐 때 손에 쥐었던 연필, 이후 필기구는 다양해졌지만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는 없다. 손으로 연필을 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곧바로 창의성과 연결된다. 편리함과 자유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연필로는 쓰고 지울 수가 있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자유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실수해도 지울 수 있는 자유 말이에요. 이는 연필의 가장 주된 특성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 장점은 창의성과도 연결되죠. 잘못 써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기에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 40p.

연필은 아주 사소한 물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소함은 곧 잊기 쉬운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저자 박지현처럼 사소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작은 것의 가치를 찾고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존재는 계속 이어진다.

저자 박지현은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의 저서 [연필]을 접하고 '연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필]은 1997년에 국내에 소개되었고, 저자는 훗날 연필에 관한 다큐를 만들겠노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방송국 PD로 일하면서, SBS스페셜 '연필, 세상을 다시 쓰다'의 다큐를 만들었다. 다큐에는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와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다큐는 연필 깎기의 달인, 연필 조각가, 잡지 관계자, 애니메이션 감독 등 연필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 [그래, 나는 연필이다]는 다큐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연필의 매력을 하나 꼽으라면, 애니메이션 감독 안재훈의 말을 언급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기회가 공평하다고 할까요. 고가의 장비를 떠나서 그냥 흑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 가지고 자기 노력으로 그림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가장 정직하고 올바르고 동기가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어요. - 212p.

나무와 흑연으로 이루어진 연필, 작고 사소한 연필 하나로 명작을 쓰고 그리는 일은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요즘처럼 빈부 격차 때문에 삶의 의욕이 꺾이는 상황에서 참 마음 든든한 물건이다. 그러고 보면 연필만큼 공정하고 공평한 물건은 없다.

연필을 쓰는 일은 인생과 닮았다. 

     인생은 연필 같아요. 처음엔 길게 시작했다가 점차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잖아요. 그리고 사라지죠. 짧아지니까. - 170p.

연필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필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1)작고 사소한 것의 의미와 2)사물과 특정한 주제에 관해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게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49p). 3)연필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또한 4)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단순한 것을 인식하고, 일상의 단순한 일들에 감사하게 해준다(97p). 무엇보다도 작은 것의 가치를 들여다보고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연필의 재발견이다.

연필 / 헨리 페트로스키 / 홍성림 / 서해문집
연필 :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2.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과 명상  

연필이라는 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인 것 같아요. 스튜디오 이름처럼 연필로 명상한다고 하는데, 스테프들이 처음 왔을 때는 '나뭇잎을 그려라, 나무를 그려라'하면 그 이미지를 생각으로 그려요. 그런데 이건 연필을 들고 나뭇잎이든 나뭇가지든 사람이든 실물을 잘 들여다보면서 그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릴 때 느낄 수 있는 교감같은 게 다르고 또 그림을 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건데, 어머님들이 항아리를 닦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장독대 항아리를 단지 일로써 닦는 게 아니라 닦으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많은 시름을 잊기도 하는데요. 연필에 그런 지점이 있어요. 깎다 보면 짧은 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는 생각이 있고요. 그리고 점점 손때가 묻는 걸 보면서 느껴지는 체취도 있고요.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기회가 공평하다고 할까요. 고가의 장비를 떠나서 그냥 흑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 가지고 자기 노력으로 그림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가장 정직하고 올바르고 동기가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어요. - 212p.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안재훈 감독.



3.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의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핸들식 연필깎이는 딱 한 개. 여름 별장 가사실에 있는데 마리코가 사용하고 있다. - 63p.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 김춘미 / 비채
Masashi Matsu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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