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보내는 일이다. 오래전 아픔은 아물고,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과 떠나보내는 것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기자라 이즈미 / 이수미 / 은행나무
Yobe No Curry, Ashita No Pan / Kizara Izumi
책이 나온 무렵인지 시간이 좀 지난 때였는지, 이 책의 리뷰를 어디에선가 봤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올해 읽은 책 중 기억에 오래 남을 책’이라는 글귀였다. 리뷰어가 흔히 쓰는 표현일 수 있겠지만, 리뷰와 함께 무척 와닿았다. 자주 가는 공공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봤다. 손에 집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읽은 후의 간단한 감상은 ‘좋은 책을 놓치지 않았다.’였다.
이 소설의 중심엔 ‘가즈키(남편, 아들)’가 있다. 그런데 실제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가즈키는 결혼하고 몇 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7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아내 데쓰코와 가즈키의 아버지 덴타로(데쓰코의 시아버지, 시부)는 같은 집에서 산다. 데쓰코는 만나는 사람(이와이)이 있다. 이와이는 데쓰코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데쓰코는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 소설은 가즈키라는 끈으로 연결된 데쓰코와 시부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가즈키, 데쓰코와 관계있는 사람들이 가즈키를 생각하는 이야기다. 연작소설인데 이번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다음 이야기에 나오기도 한다. 잘 읽어보면 등장인물이 겹치는 부분에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이웃에 승무원으로 일하는 여자(다카라)가 어느 날 갑자기 웃을 수 없게 되어서 직장을 그만둔다. 다카라는 가즈키의 어릴 적 친구였고, 가즈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다카라는 문병을 온다. 시간이 흘러 가즈키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가족에게 듣는다. 그리고 다카라는 시부와의 만남으로 마음속 짐을 떨쳐버리고, 다시 웃을 수 있게 된다.
시부에게 등산을 권유하는 데쓰코는 등산 가이드를 소개한다. 시부와 등산녀는 함께 산행을 하는데, 등산녀의 모습에서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 유코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들을 안고 있던 유코의 모습이다. 시부는 마음이 울컥한다. 아내에게 못해 준 것이 너무 많아서 후회스러울 뿐이다.
며느리 데쓰코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부도 안다. 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못한다. 여러 에피소드를 거치고 드디어 시부, 데쓰코, 이와이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시부와 이와이의 거리감도 줄이고, 새로운 가정을 꾸릴 두 사람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느새 마당으로 나온 데쓰코가 풀을 뽑는 시부 옆에서 서츠를 팡팡 두드려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보니 집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어둡고 흐릿한 반면, 바깥 풍경은 밝고 강렬했다. 이와이는 행주를 손에 쥔 채, 마당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꼭 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데쓰코가 왜 이 집에 계속 머무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시부가 그렇게 고민하는 것도 이 생활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데쓰코에게 결혼하자고 일방적으로 졸랐던 자신은 참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이 생활에 이와이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 211p.
아들을 잃은 시부, 남편을 잃은 데쓰코. 7년의 시간 동안 떠난 이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두 사람. 가즈키라는 끈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약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죽은 이를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젠가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마침표를 찍을지 알 수 없다.
데쓰코가 시부 쪽을 향해 예의를 갖추고 앉더니 “아버님”하고 불렀다. 아버님이라 불린 게 오랜만이어서인지 시부가 흠칫 놀라며 잠시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각오한 듯 똑바로 안는다.
“이제 괜찮겠지요? 가즈키를 보내줘도.”
시부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여기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시부가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셋 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데, 전구가 미쳤는지 별안간 반짝반짝 점멸했다. 시부가 올려다보며 “가즈키도 그러라고 하네.”라고 말했다. - 221p.
시부와 시어머니(유코)가 결혼하는 과정까지 나오니 한 집안의 이야기도 되겠다. ‘유코’편을 읽다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둘이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가즈키를 낳고,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들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며느리 데쓰코를 이 집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오래전 아픔은 아물고,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 어린 시절 가즈키와 데쓰코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제목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이 등장한다. 저자는 카레가 과거를, 빵이 미래를 상징한다고 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매일매일의 일상이 모여 인생을 만든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이 이어지듯 삶은 계속된다.
둘의 존재를 모를 때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훗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보내는 일이다. 이 책 정말 좋다. 재미는 물론이고 잔잔한 감동, 행복, 여운이 있다. 내 주변의 모든 인연이 좋은 인연이고 내 삶의 등장인물이다.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유코 : 가즈키의 엄마, 렌타로 : 가즈키의 아빠, 훗날 데쓰코의 시부)
유코는 마당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되도록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끔 큰 은행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렌타로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올려다보니 무척 훌륭한 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왠지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손질해온 집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또 그 시어머니에게 이어받았겠지? 언젠가 이 은행나무도 사라질까? 왠지 무척 쓸쓸해졌다. 내 힘으로 이 집을 지키고 싶어졌다. 여기서라면 살아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게 과연 손해일까? - 1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