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 긱 워커로 일하기. 미래의 경제 패러다임

나는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 긱 워커로 일하기. 미래의 경제 패러다임


나는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 토머스 오퐁 / 윤혜리 / 미래의 창
Working In The Gig Econocy / Thomas Oppong 

Working In The Gig Econocy / Thomas Oppong



'긱(gig)'이라는 용어는 재즈 음악가가 하룻밤에만 단기 계약으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 속어였다. 이 용어가 양지로 나온 것은 십수 년 전이다. 메이커스 운동이 시작되고, 전기, 전자, 기계, 공작 등의 분야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고 공개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마니아 혹은 마니아 집단을 긱(gi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확장이 되어 지금은 어느 분야의 전문가(긱 워커, gig worker)를 일컫는다. 그들의 경제활동을 ‘긱 경제(gig economy)’라고 부른다.

‘긱 경제(gig economy)’란 고용주가 필요에 따라 사람을 구해 단기로 계약을 맺고 일회성의 일을 맡기는 경제 방식을 뜻한다. 근로자는 어딘가에 소속돼 있지 않고 필요할 때만 일을 구하는데 이 일을 ‘긱 워크(gig work)’, ‘긱(gig)’ 혹은 ‘독립형 일자리’라고 한다. 긱 경제로 수입을 내는 사람, 즉, ‘긱 워커(gig worker)’ 혹은 ‘독립형 근로자’는 근로 시간을 스스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 13p.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고용체계가 변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디지털, 비대면 환경이 강화되었다. 직장에 소속된 직원이 아닌, 회사와 계약을 통해 일을 맡는 계약근로자가 늘어났다. 긱 워커는 디지털 노마드, 프리랜서, N잡러, 플랫폼 노동자의 형태로 매우 다양하다. 이런 작업환경과 고용 여건은 점점 고착될 것이다. 그에 따른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초기의 긱 경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안고 있다. 규제가 뒤따르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어찌 되었든 대세는 기존의 고용 방식에서 긱 경제체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대비를 해야 한다. 

이 책은 긱 워커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어떻게 일거리를 찾고, 대가를 지불받는지, 고객관리, 사업의 확장에 관해서 도움이 될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시작’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분야를 찾았다면, 그다음부터는 이 책의 도움말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긱 워커로 살고 싶다면?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내가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
클라이언트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라
자기 관리의 기술로 혼자서도 효율적으로 일하라
자동화 기술로 더 쉽게 돈을 관리하라
일이 끊이지 않게 하는 마케팅 시스템을 구축하라

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이다.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도 막상 뛰어들기가 어렵다. 그다음으로 어려운 것은 그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 실질적으로 수익을 얻으려면 자신을 홍보하고 일거리를 찾고, 고객이 만족할 결과를 제공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으면 된다. 

저자는 각 단계별로 필요한 행동, 방법을 제시한다. 일단 한번의 거래가 성사되면 그것을 계기로 꾸준히 일거리가 들어오도록 시스템을 정비한다. 고객과의 관계, 효율적인 시간 관리, 업무 방식, 자동화 및 마케팅 등 사업을 키우는 일이 남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어렵고, 사업을 벌이는 것도 어렵다. 고객과 계약을 해서 일을 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되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긱 워커의 비중이 많아질 것이다. 대비하지 않으면 경제활동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긱 워커의 시대가 온다. 긱 워커로 일하는 것이 바로 미래다.



나는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 경력을 재구성하라 


(긱 워커로 일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경력, 브랜드뿐이다. 경력에 관한 저자의 글이 있어서 인용한다.)

긱 경제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다. 가장 큰 변화는 달라진 경제 형태로 전 세계 곳곳의 전문가와 기업이 서로 기술과 전문 지식을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긱 경제에는 많은 기회가 숨어 있다. 만약 자신이 근무의 유연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바로 긱 경제에 뛰어들 시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처럼 한 가지 직업을 골라 그 길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에 열정이 생기고 관심사가 수시로 바뀔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직업을 원한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어렵지 않게 직종을 전환할 수 있다. 이제 일하는 것과 직장 생활을 동일시하던 시각은 약해지고 각각의 프로젝트가 이어지는 것을 일이라고 보는 시각이 점차 보편화하고 있다. 당신도 독립형 근로자가 되어 최선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보라.

경력을 한 권의 책이라고 가정해보자. 전통적인 경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라고 볼 수 있고, 독립형 근로자의 경력은 여러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경력의 재구성이란 마치 1장까지 집필을 끝내고 2장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과거에는 직업이나 경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나면 변화를 피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변화를 경력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경력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오전 0시의 몸값 - 여대생 납치 후 몸값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받는 전대미문의 범죄

여대생 납치 후 몸값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받는 전대미문의 범죄. 납치를 공개하고 몸값도 공개적으로 받는다. 납치범의 숨은 목적은?

오전 0시의 몸값 - 여대생 납치 후 몸값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받는 전대미문의 범죄


오전 0시의 몸값 / 교바시 시오리 / 문승준 / 내 친구의 서재 
Shiori Kyobashiy 

오전 0시의 몸값 / 교바시 시오리 / 문승준 / 내 친구의 서재



1.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여대생(나코)이 법률회사의 자문을 받으러 왔다. 신임 변호사(고야나기)가 담당을 하면서 구체적인 진행을 앞두고 있었는데 의뢰인이 저녁 식사 후 사라졌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심적 부담이 생겨서 잠시 시간이 필요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보스는 나코가 어떤 사정으로 떠났지만 내일 각오를 다지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침에 텔레비전을 켠 내 눈에 뉴스 속보가 날아들었다.
대학생 납치. 몸값 10억 엔 모금 요구.
혼조 나코를 납치한 범인이 크라우드펀딩으로 몸값 10억 엔을 모금하도록 요구했다는 황당한 사건을 알리는 뉴스였다. - 65p. ~ 66p. 

범인은 크라우드펀딩 회사를 지정하고, 모금방식도 제한했다. 범인은 1인당 펀딩 상한액과 펀딩 횟수까지 정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제안에 경찰은 물론 법률회사와 펀딩회사 모두 당황했다. 도무지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2.
펀딩회사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로 범인의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고, 언론사가 이를 공개했다. 편지엔 납치된 나코의 사진이 있었다. 손발이 묶여있고 밧줄 아래 피부는 멍이 들어있었다. 다음 날,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는 몸값 모금 준비에 착수한다. 오늘 밤 날짜가 바뀌는 0시부터 펀딩 전용사이트에서 몸값 모금이 시작되어, 다음날 오전 0시까지 24시간뿐이다. 

이 몸값 모금은 얼마나 협력자를 많이 모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액을 모두 채운다 해도 5천 엔 모금이 최소 16만 건 이상 모이지 않으면 나코의 목숨은 없다. 무관심은 나코를 죽이게 된다. - 167p. 

변호사 고야나기는 신문기자 고다를 만난다. 고다는 한 가지 의혹을 제기한다. 여대생 납치사건은 위장일 뿐 본 목표는 다른 것 같다고.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가 목표인 것 같다고.

“몸값을 모금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범인은 회사의 업무를 방해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에는 사실 다른 협박 메일이 왔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쪽이 진짜 요구라고.” - 144p. 

고다가 제기하는 더 큰 의혹은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와 법률회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법률회사의 보스(미사토)가 직접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고야나기는 보스와 고다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 갈등한다. 

3.
모금이 시작되었다. 방송사는 크라우드펀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모금 방법을 설명한다. 실제 모금 화면과 동일하게 구성한 화면으로 신청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인터넷에도 신청 방법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드디어 시곗바늘이 0시를 가리켰고, 대학생 납치사건의 몸값 모금이 시작되었다. 모금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대로 가면 모금액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모금 막바지에 이르러 모금 취소액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짜뉴스가 떠돌면서 여대생 집안을 공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금액은 정체되었다. 

납치 피해자 혼조 나코의 아버지는 방송국 메인 앵커 혼조 겐고이고 어머니 또한 방송인이다. 방송국에서는 혼조 겐고를 등장시켜 분위기를 바꾸려 한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자기 딸이, 자기 가족이 갑자기 실종된 날을. 갑자기 범인에게서 묶여있는 소중한 가족의 사진이 도착한 기분을. 저라면 견딜 수 없습니다.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요. 만약 자신이 혼조 씨 입장이라면 어떻게든 가족을 돕고 싶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갈망할 것입니다. 여러분 좀 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주위 분들과 손을 맞잡아주셨으면 합니다.” - 204p.

결국 모금액과 취소액이 경쟁을 하더니 10억 엔에 이르지 못하고 끝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범인은 차량 폭발 사고로 죽고 나코는 극적으로 탈출한다. 이렇게 납치사건과 몸값 모금은 끝난다.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야나기는 보스의 행동과 말에 의심을 품는다. 뭔가 눈에 거슬리는 정황들이 보였다. 

문득 고다의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범인의 진짜 타깃은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로, 혼조 나코는 말려들었을 뿐. 사이버앤드인피니티 사는 범인의 진정한 협박을 숨기고 있다. - 179p. 

결국 진범과 사건의 내막이 밝혀진다. 마지막 부분은 기자 고다의 특별기고문 형태로 사건의 전모를 설명한다. 하나의 사건을 덮기 위해서 다른 사건을 만든다. 다른 큰 사건에 매몰되면 처음 사건의 본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다. 

4. 
2021년, 작가는 첫 소설 [오전 0시의 몸값]으로 제8회 신초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한다. 데뷔 전, 작가는 일반기업에 근무하면서 라디오 드라마나 무대 대본 등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고, 두 차례 입상한다. 스위스에서 장기 체류할 당시,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한다. 

저자 교바시 시오리는 스위스에 체류하던 중 유럽 곳곳에서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납치나 테러가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같은 사건이라도 국가에 따라 언론의 태도와 여론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본 저자는 만일 몸값을 국민에게서 모금하라고 요구하는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여론이 반응하는 양상을 그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 누구나 몸값 모금에 참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궁리하던 중 ‘크라우드펀딩’을 떠올렸고,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비공개수사가 원칙인 납치 범죄의 룰 자체를 바꾸게 되었다. - 출판사 제공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납치 미스터리물의 신경지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이 소설은 기존의 납치물과 차별화된 전개를 따른다.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크라우드펀딩을 이용한 몸값 모금 / 납치사건의 ‘공개성’ / 몸값을 받는 방법의 특이성

납치사건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수사 또한 비밀리에 진행된다. 몸값을 요구하고 받는 과정이 모두 비공개여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3가지를 모두 바꿨다.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돈을 받는다고? 이게 가능해? 하면서. 

* 신초미스터리대상 : ‘신초사’가 ‘도에이 영화사’와 손잡고 출판, 영상 등 다양한 분야로 전개할 수 있는 지적재산권을 발굴하기 위해 2014년에 창설한 문학상. 신초사는 미야베 미유키, 이사카 고타로, 미치오 슈스케 등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를 발굴해왔다. 



5. 변호사는 의뢰인을 흰색이라고 믿고 변호한다. (본문 인용)
 
“7년 전,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담당 변호인님이 영웅이자 구세주였습니다. 미사토 선생님도 학생 때 사실 구세주를 찾으셨죠? 도와줬으면 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분명 대충대충 대응하는 모습에 실망하셨겠죠? 그래서 스스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대학생이었을 때 형의 담당 변호인이 그랬어요. 판사는 무죄 판결을 내릴 때도 새하얗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단지 검은색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뿐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검은색이라고 생각해도 때로는 자신만은 흰색이라고 믿고 온 힘을 다해 변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누명을 벗을 수 없다고. 그 말을 듣고 온 세상이 검은색으로 단정하고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 128p.

여자들의 등산일기 - 산은 많은 것을 내어준다. 등산하는 여자들의 이야기(山女日記). 등산예찬.

여자들의 등산일기 - 산은 많은 것을 내어준다. 등산하는 여자들의 이야기(山女日記). 등산예찬.


여자들의 등산일기 (山女日記) / 미나토 가나에 / 심정명 / 비채
山女日記 / Kanae Minato

여자들의 등산일기 (山女日記) / 미나토 가나에 / 심정명 / 비채



인자요산(仁者樂山) :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인자요산'이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공자님 말씀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악인이 없다는 말도 그것에서 파생된 말일 것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넉넉하고 친절하다. 여유롭고 배려심도 많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산을 좋아하면 어진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심란하고 조급할 때, 마음을 정화하고 싶을 때 산을 찾기도 한다. 산은 진중함과 넉넉함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

미나토 가나에가 산에 오르는 사람을 소재로 이야기를 썼다. 작가의 작품들은 범죄, 스릴러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작품이다. 작가의 말을 가져오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 소설을 쓴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여성, 통칭 ‘마운틴 걸’이 모이는 ‘여자들의 등산 일기’라는 사이트가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여성, 등산에 입문하려는 여성, 기타 등산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이 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주인공도 이 사이트에서 등산 정보를 얻는다. 일본의 100대 명산을 차례로 오르려는 원대한 목표도 세운다.

혼자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주인공. 때로는 동료, 가족, 애인과 산에 오르고, 산에서 새로운 동행을 만나기도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적지까지 오르는 동안, 가족과의 문제, 동료와의 문제, 애인과의 관계 등 생활하면서 안고 있던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을 인생에 비유하는 것은 진부하지만 적절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발 디딘 만큼 올라갈 수 있고, 고난을 하나하나 이겨내면 정상에 도달한다. 이 책은 이런 진부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기 주변의 상황과 등산 과정 중에 맞닥뜨리는 상황을 연결하고, 그 부분에서 자신의 이해심을 넓게 한다. 많은 고민과 슬픔, 아쉬움, 화를 안고 산에 오르지만, 등산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산의 풍경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감정을 해소한다. 그래서 집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새로이 하게 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동료의 입장도 이해하게 된다. 결혼을 앞둔 애인에 대해서도 현명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했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크든 작든 고민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 361p.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리등산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산을 마주하면 옹졸했던 마음도 넉넉해지고, 의기소침했던 마음도 활력을 찾는다. 내 주변의 심각했던 문제들도 산행 후에 사소한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삶은 충분한 활력과 넉넉함으로 충만해진다. 등산은 그런 것을 얻게 해준다. 이 책은 등산예찬이다.

“좋지 않나요, 산? 빨리 올라가려 할 필요는 없어요.
한 걸음씩 천천히 발을 내딛다 보면 목적지에 확실히 도착하거든요”

앞서 ‘인자요산’을 이야기했다. 일단 산에 오르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다. 힘들여 정상에 오른다. 오르는 과정에서 힘이 들고 땀을 흘린다. 과정을 착실히 밟고 올라가는 일. 최근에 사회 분위기가 과정을 무시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이 사회는 땀 흘리는 사람, 과정에 충실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책이 ‘등산예찬’이라 말 한 것은 등산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등산하는 과정을 경건하게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예전에 읽고 다시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질 때, 자신의 가치를 다시 찾고 싶을 때, 산에 오를 일이다. 산은 많은 것을 내어준다.



참고 :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평정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 옹야(雍也). 공자

맹자는 옳고 그름을 판별해 낼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지혜의 출발이고,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의 출발이라고 했다. 공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 백과사전

살인의 문 / 히가시노 게이고 - 좋은 인연은 가까이, 악연은 멀리.

살인의 문 / 히가시노 게이고 - 좋은 인연은 가까이, 악연은 멀리.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재인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재인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재인


1. ‘증오’에서 ‘살인’으로 가는 문. (살인의 문 1)


히가시노 게이고의 [살인의 문]. 이 작품에 독자가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의 불행으로 재미는 느끼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고, 괴롭힘당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살의를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커지면 살인까지 이르게 되는 것일까.

주인공 다지마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다. 그의 인생이 불행으로 방향을 튼 것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노쇠한 할머니의 죽음에 다지마의 엄마가 독살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부모가 이혼하고 집안이 몰락한다. 다지마는 그 소문 때문에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는 더 심한 따돌림과 폭력을 당한다.

외톨이가 된 다지마에게 위안이 된 것은 초등학교 동창인 구라모치다. 구라모치는 영악하고 말재주가 좋아, 사람을 잡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구라모치와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다지마의 주변에 일어난 많은 일들이 구라모치의 속임수 때문에 일어난 것을 알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이용당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 속에서 다지마는 일방적으로 속고 이용당하는 피해자로, 구라모치 악인으로 묘사된다. 구라모치가 등장할 때마다 다지마는 계속 속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읽다 보면 불길하고 답답한 마음이 일어난다. 직장을 그만두고 구라모치와 같이 살면서 구라모치를 파악하려하지만 매번 구라모치의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 또 농락당한다. 다지마는 구라모치를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살인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살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동경하는 건 분명한 동기가 있고 살인의지가 지속적이며 냉철하게 실행에 옮기는 유형의 살인이었다. - 124p.

     시마코 때문에 추락한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그보다 나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여자를 죽일까 하는 것이었다. 죽인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이겠다는 결의는 얼마나 강렬한가, 그런 것들도 궁금했다. - 176p.

동기가 있다고 반드시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인의 문’을 넘어야 한다. 다지마는 인간에게 ‘증오’와 ‘악의’가 살의를 넘어서 살인을 하게 되는 과정에 파고든다. 다지마의 인생은 구라모치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는다. 다지마는 구라모치를 살해할 수 있을까? 살인의 문을 넘을 수 있을까?



2. 잘못된 인연, 악연의 끝은 어디인가? (살인의 문 2)


 [살인의 문] 1권은 구라모치가 주인공 다지마의 삶을 농락하는 내용이었다. 학교생활부터 직장까지, 구라모치가 등장하면 다지마는 어김없이 그의 술수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구리모치는 정말 지독한 인물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분노도 그렇지만 책을 읽는 독자도 그의 악행에 치를 떤다. 2권에서는 한술 더 떠서 다지마를 삶의 끝까지 몰아간다.

     도대체 왜 나는 구라모치 때문에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는 왜 끈질기게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일까. 내가 편히 살 곳을 찾거나 심신을 쉬게 할 장소를 확보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그곳에서 끌어내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고자 나타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 구라모치가 끊임없이 내 주위를 맴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가장 다루기 쉬운 상대, 그것이 바로 나였다. - 121p.

구라모치의 영역에서 벗어나 가구점에서 조용히 자리 잡고 살던 다지마를 구라모치는 또 찾아내서 작업을 건다. 다지마는 매번 구라모치에게 속으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이번에는 어림없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구라모치가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 다지마는 구라모치의 계획에 반대로 행동하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구라모치의 계획이었다.

다지마는 결혼을 하지만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다. 아내의 과소비를 감당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하고, 결국 막대한 위자료를 주며 이혼을 한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결혼마저도 구라모치의 계획이었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151p).’ 다지마는 살의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 살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다지마는 살의를 증폭시키지만, 실행으로 옮기는 일에 실패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어떤 걸까, 어떤 기분이 들까, 사람은 얼마나 막다른 곳에 내몰렸을 때 살인을 하게 될까, 그런 것들이 궁금할 뿐이었다. - 123p.

     살인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그 둘 사이에 만일 경계선이 존재한다면 당시 내 마음은 그 경계선 주위를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 295p.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 때문에 내 앞길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다지마와 구라모치. 이런 악역도 없다. 악연의 끝엔 엉망진창이 된 다지마의 삶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도 더이상 악연이 이어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동기가 있다고 반드시 살인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동기도 필요하겠지만 환경이나 타이밍, 그 당시의 기분 같은 것들이 맞아떨어졌을 때 사람은 살인을 저지릅니다.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기가 없으면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하지 못하죠. - 312p. ~ 313p.

좋은 인연은 가까이하고, 악연은 멀리 하라는 말이 와닿는다. 악연은 내 삶을 갉아먹는다.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1.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의 재발견


그래, 나는 연필이다 / 박지현 / 퓨처미디어
 
     연필을 손에 쥐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써 나가며, 미래로 진보하는 자유를 얻는다. 세월을 이겨낸 위대한 발명품과 작품들의 시작엔 연필이 함께 했다. 베토벤의 오선지와 반 고흐의 화폭, 그리고 에디슨의 손에도 연필은 쥐어져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 쓰여 있는 이 문장들은 연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의미를 압축한 문장이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익힐 때 손에 쥐었던 연필, 이후 필기구는 다양해졌지만 연필만큼 기본에 충실한 도구는 없다. 손으로 연필을 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곧바로 창의성과 연결된다. 편리함과 자유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연필로는 쓰고 지울 수가 있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자유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실수해도 지울 수 있는 자유 말이에요. 이는 연필의 가장 주된 특성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 장점은 창의성과도 연결되죠. 잘못 써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기에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 40p.

연필은 아주 사소한 물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소함은 곧 잊기 쉬운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저자 박지현처럼 사소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작은 것의 가치를 찾고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존재는 계속 이어진다.

저자 박지현은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의 저서 [연필]을 접하고 '연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필]은 1997년에 국내에 소개되었고, 저자는 훗날 연필에 관한 다큐를 만들겠노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방송국 PD로 일하면서, SBS스페셜 '연필, 세상을 다시 쓰다'의 다큐를 만들었다. 다큐에는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와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다큐는 연필 깎기의 달인, 연필 조각가, 잡지 관계자, 애니메이션 감독 등 연필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 [그래, 나는 연필이다]는 다큐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연필의 매력을 하나 꼽으라면, 애니메이션 감독 안재훈의 말을 언급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기회가 공평하다고 할까요. 고가의 장비를 떠나서 그냥 흑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 가지고 자기 노력으로 그림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가장 정직하고 올바르고 동기가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어요. - 212p.

나무와 흑연으로 이루어진 연필, 작고 사소한 연필 하나로 명작을 쓰고 그리는 일은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요즘처럼 빈부 격차 때문에 삶의 의욕이 꺾이는 상황에서 참 마음 든든한 물건이다. 그러고 보면 연필만큼 공정하고 공평한 물건은 없다.

연필을 쓰는 일은 인생과 닮았다. 

     인생은 연필 같아요. 처음엔 길게 시작했다가 점차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잖아요. 그리고 사라지죠. 짧아지니까. - 170p.

연필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필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1)작고 사소한 것의 의미와 2)사물과 특정한 주제에 관해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게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49p). 3)연필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또한 4)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단순한 것을 인식하고, 일상의 단순한 일들에 감사하게 해준다(97p). 무엇보다도 작은 것의 가치를 들여다보고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연필의 재발견이다.

연필 / 헨리 페트로스키 / 홍성림 / 서해문집
연필 :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2. 그래, 나는 연필이다 - 연필과 명상  

연필이라는 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인 것 같아요. 스튜디오 이름처럼 연필로 명상한다고 하는데, 스테프들이 처음 왔을 때는 '나뭇잎을 그려라, 나무를 그려라'하면 그 이미지를 생각으로 그려요. 그런데 이건 연필을 들고 나뭇잎이든 나뭇가지든 사람이든 실물을 잘 들여다보면서 그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릴 때 느낄 수 있는 교감같은 게 다르고 또 그림을 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건데, 어머님들이 항아리를 닦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장독대 항아리를 단지 일로써 닦는 게 아니라 닦으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많은 시름을 잊기도 하는데요. 연필에 그런 지점이 있어요. 깎다 보면 짧은 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는 생각이 있고요. 그리고 점점 손때가 묻는 걸 보면서 느껴지는 체취도 있고요.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기회가 공평하다고 할까요. 고가의 장비를 떠나서 그냥 흑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 가지고 자기 노력으로 그림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가장 정직하고 올바르고 동기가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어요. - 212p.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안재훈 감독.



3.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의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핸들식 연필깎이는 딱 한 개. 여름 별장 가사실에 있는데 마리코가 사용하고 있다. - 63p.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 김춘미 / 비채
Masashi Matsuie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막강한 캐릭터 블랙 쇼맨. 시리즈가 반갑다.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막강한 캐릭터 블랙 쇼맨. 시리즈가 반갑다.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RHK
Black Showman to Maboroshi No Onna / Keigo Higashino, 東野圭吾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RHK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는 유명한 캐릭터가 두 명 있다. 유가와 교수와 가가 형사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이어가는 힘이 된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던 때, 작가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다. 

블랙 쇼맨. 시리즈 첫 작품인 장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에서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코로나 현실’을 잘 반영한 묘사였다. 코로나가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장례식장, 식당, 카페, 숙박업소의 현황이 잘 묘사되었다. 업소의 방역, 손님의 주의사항, 마스크 착용 습관, 대인관계 등을 빠르게 작품에 적용하였다. 또 하나는 ‘블랙 쇼맨’의 등장이었다. 이 인물은 알려진 게 거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과거에 마술을 했다는 것과 도쿄에서 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과거 잘나가던 마술사 가미오 다케시는 눈속임과 손기술, 화려한 쇼맨십으로 상대방의 눈과 귀, 마음을 빼앗는 기술이 탁월하다. 작은 단서 하나로 많은 것을 유추하는 능력은 현대판 셜록 홈즈 같다. 게다가 과감한 행동력은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 시키며 작품의 재미를 증가시킨다. 전작이 장편의 묘미를 잘 살렸다면, 후속작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는 단편의 맛이 잘 우러난다. 단편으로 재정비했으니 그다음 작품은 장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바 '트랩 핸드'와 마스터 가미오 다케시. 그는 바에 찾아온 고객의 사연에 맞춰 칵테일을 만든다. 손님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과 비밀이 있다. 이번 작품은 세 명의 여성이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3편을 엮은 것이다. 마스터 다케시는 카페를 찾아온 손님을 응대하며 그들의 문제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물심양면 도와준다. 

1) 맨션의 여자
막대한 유산으로 물려받은 여성. 오래전에 관계를 끊은 친오빠가 등장하면서 유산을 노린다. 여성은 그에게 한 푼도 떼 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 여성에게는 또다른 사연이 있었다. [외사랑(아내를 사랑한 여자)]에서 등장했던 ‘호적 바꾸기’가 다시 등장한다. 작은 단서, 소품 하나, 말 한마디로 중요한 내용을 알아내는 다케시. 천하무적이다.

2) 위기의 여자
‘트랩 핸드’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남녀. 사귈까 말까 망설이는 분위기. 여자는 남자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때 마스터 다케시의 눈에 남자의 몹쓸 짓이 포착된다. 화려한 손기술로 여자를 위기에서 구하고 남자를 응징한다. 이 여자는 다음 편에도 깜짝 등장한다. 

3) 환상의 여자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했던 여자. 죽은 연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다케시는 여자가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남자의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치밀한 사전 준비, 지인들의 도움, 의외의 인물 섭외. 신기술 ‘딥페이크’를 적용한다. 불륜과 치정극으로 시작했지만 따뜻함과 치유로 마무리 짓는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후회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현실의 자신을 갉아먹는다. 세 여성이 그렇다. 인생의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애쓰지만, 매번 망설이고 포기한다. 벗어나려면 태세를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 원점에서,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다케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을 파악하고 바람직한 도착점을 알아낸다. 그리고 도착점에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길을 찾는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번 연작을 통해, 분량은 적지만, 묵직한 주제 의식을 담아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비극의 원형을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낸다. 작가의 매력, 캐릭터의 매력이 풍성한 작품이다. 블랙 쇼맨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 정도 작품이면 조만간 영상화될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어떤 배우가 좋을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블랙쇼맨 시리즈
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 최고은 / 히가시노 게이고 / 알에이치코리아(RHK)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최고은 / 히가시노 게이고 / 알에이치코리아(RHK)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 최고은 / 히가시노 게이고 / 알에이치코리아(RHK) 

독거인의 코인빨래방 이용기. 그리고 지구를 살리는 빨랫줄.

독거인의 코인빨래방 이용기. 그리고 지구를 살리는 빨랫줄. 


코인빨래방과 빨랫줄. 

세탁기가 고장 났다.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세탁기를 새로 사야 하는데, 사정이 있어서 미루고 있다. 그럼 빨래는 어떻게 하는가. 여름이라 옷이 얇으니 매일 조금씩 손빨래한다. 이것도 나름 할만하다. 문제는 이불이다. 습한 여름, 장마철, 이불은 늘 눅눅하다. 관리를 잘못하면 곰팡이도 생긴다. 퀴퀴한 냄새도 난다. 조금이라도 햇살이 비치면 이불을 널어야 한다. 

집 근처에 코인빨래방이 있다. 생긴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장사가 안되는 치킨집이 있었다가 문을 닫고 한동안 내부 수리를 하더니 빨래방이 생겼다. 독신 도시인의 로망 중 하나가 야간에 코인빨래방 가서 세탁하며 시간 보내는 거라고 누가 그러던데. 내가 사는 곳은 대도시가 아니고, 빨래방도 도시 외곽에 있어서 낭만은 없다. 그저 빨래방의 효용성만 있을 뿐이다.


코인빨래방 내부

코인빨래방 내부


전혀 이용할 것 같지 않던 빨래방을 내가 이용하게 된 것은 세탁기가 고장 난 이유 때문이다. 당장 이불을 빨아야겠고. 그래서 하루 날 잡아서 갔다. 처음 사용하는 거니까 사용설명서 잘 읽어보고 지폐를 500원 동전으로 바꾸고 빨래 시작. 무사히 첫 사용을 마쳤다. 옆에는 건조기도 있다. 500원 동전 하나 넣으면 세탁한 것을 건조할 수 있다. 나는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탈수만 하고 나왔다. 그리고 아파트 놀이터 옆 철제 벽에 넣었다. 무더운 여름, 햇볕에 빨래 말리기는 그야말로 ‘친환경’적이다. 돈도 안 들고 기계에 말린 것과는 다르게 더 뽀송뽀송하다.

존 라이언의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에 보면, 7가지 물건 중 하나가 ‘빨랫줄’이다.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건조기의 전기사용이 많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겨울, 비 올 때, 장마철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여름 뙤약볕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나. 더위로 힘들지만 빨래 말릴 때라도 이용할 수 있으면 좋지. 


이불을 널다

이불을 널다

영상 :


Things I love about May: Bee Gees, green oaks, fringe tree, and decent weather.

Things I love about May: Bee Gees, green oaks, fringe tree, and decent weather. First of May by Bee Gees.   I've...